세우거나 쓰러지지 않고 구겨진
2024
<세우거나 쓰러지지 않고 구겨진> 전시에는 언제 어떻게 찍었는지 알 수 없는 우연히 찍혀 휴대폰에 저장된 어쩌다 찍힌 사진들로 구성되어 있다. 작가는 어쩌다 찍힌 사진들을 통해 어떠한 계획이나 의도 없이 찍혔다는 점에서 무언의 해방감을 경험한다.
<세우거나 쓰러지지 않고 구겨진> 전시에는 언제 어떻게 찍었는지 알 수 없는 우연히 찍혀 휴대폰에 저장된 어쩌다 찍힌 사진들로 구성되어 있다. 작가는 어쩌다 찍힌 사진들을 통해 어떠한 계획이나 의도 없이 찍혔다는 점에서 무언의 해방감을 경험한다.
Froissé sans se lever ni tomber
2024
L'exposition < Froissé sans se lever ni tomber > est constituée de photos prises accidentellement dont on ne sait ni quand ni comment elles ont été prises et enregistrées sur un téléphone portable. À travers des photos prises accidentellement, l’auteur éprouve un sentiment tacite de libération dans la mesure où elles ont été prises sans aucun plan ni intention.
2024
L'exposition < Froissé sans se lever ni tomber > est constituée de photos prises accidentellement dont on ne sait ni quand ni comment elles ont été prises et enregistrées sur un téléphone portable. À travers des photos prises accidentellement, l’auteur éprouve un sentiment tacite de libération dans la mesure où elles ont été prises sans aucun plan ni intention.
Crumpled without getting up or falling
2024
The exhibition < Crumpled without getting up or falling > is made up of accidentally taken photos of which we do not know when or how they were taken and recorded on a mobile phone. Through photos taken accidentally, the author experiences a tacit feeling of liberation to the extent that they were taken without any plan or intention.
2024
The exhibition < Crumpled without getting up or falling > is made up of accidentally taken photos of which we do not know when or how they were taken and recorded on a mobile phone. Through photos taken accidentally, the author experiences a tacit feeling of liberation to the extent that they were taken without any plan or intention.
어쩌다 찍힌 사진, 사진, 연작 1번, 100 x 150cm, 2024
어쩌다 찍힌 사진, 사진, 연작 2번, 90 x 120cm, 2024
어쩌다 찍힌 사진, 사진, 연작 3번, 100 x 150cm, 2024
어쩌다 찍힌 사진, 사진, 연작 4번, 100 x 150cm, 2024
어쩌다 찍힌 사진, 사진, 연작 5번, 100 x 150cm, 2024
어쩌다 찍힌 사진, 사진, 연작 6번, 70 x 100cm, 2024
어쩌다 찍힌 사진, 사진, 연작 7번, 100 x 150cm, 2024
어쩌다 찍힌 사진, 사진, 연작 8번, 100 x 150cm, 2024
어쩌다 찍힌 사진, 사진-조각, 연작 9번, 100 x 200cm, 2024
어쩌다 찍힌 사진, 사진-조각, 연작 10번, 50 x 100cm, 2024
어쩌다 찍힌 사진, 사진, 연작 11번, 100 x 150cm, 2024
어쩌다 찍힌 사진, 사진, 연작 12번, 30 x 30cm, 2024
어쩌다 찍힌 사진, 사진, 연작 13번, 30 x 30cm, 2024
어쩌다 찍힌 사진, 사진, 연작 14번, 30 x 30cm, 2024
어쩌다 찍힌 사진, 사진, 연작 15번, 30 x 30cm, 2024
어쩌다 찍힌 사진, 사진, 연작 16번, 30 x 30cm, 2024
어쩌다 찍힌 사진, 사진, 연작 17번, 30 x 30cm, 2024
어쩌다 찍힌 사진, 사진, 연작 18번, 30 x 30cm, 2024
어쩌다 찍힌 사진, 사진-조각, 연작 19번, 50 x 60cm, 2024
어쩌다 찍힌 사진, 사진-조각, 연작 20번, 50 x 50cm, 2024
어쩌다 찍힌 사진, 사진-조각, 연작 21번, 50 x 50cm, 2024
슬래시 : 세우거나 쓰러지지 않고 / 구겨진
비주류는 주류가 아니고(<비:주류>) 비정체성은 정체성이 아니다(<비 정체성의 초상화>). 없는 것이 아니라 아닌 것. 부정은 부재가 아니다. 아무것도 없지 않은 잔해(<아무것도 없지 않은 황량한 장소>, <형태 잃은 잔해>)는 없는 것이 아니라 없어지는 것, 없어지며 남겨지는 것이다. 소멸과 잔존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아닌 것과 남겨지는 것에 눈길이 가는 김기훈은 그렇게 형태를 잃어가고 사라져가는 것들에서, 부정되는 한편 부재하지 않는 것들을 발견한다. 전단지를 떼고 남은 테이프에서(<전단지 테이프>) “부재의 공간, 빈 공간, 사유의 공간이 사라져가는”(김들림) 것을 보는 눈은 없는 공간이 있는 공간이 되는 장면을 보는가 하면 공간의 있음에서 없음이 암시되는 장면을 본다. 없는 공간이 있는 공간이 되는 한편 공간의 있음이 없음을 암시하는 장면은 오래 보아야 보이는 것. 사유하며 보고 보며 사유하기를 거듭하는 김기훈의 사진은 의미를 담고, 의미를 담는 눈은 순간에서 시간으로 다시 시간에서 순간으로 넘어온다. 어쩌다 찍힌 사진에서 순간을 보는가 하면 이 사진이 구겨진 조각에서 시간을 보는 눈. 능동과 피동 사이에 수동이 있다면, 어쩌다 찍힌 순간과 그 순간을 발견하는 순간 사이에는 어쩌다 찍힘이 지속하는 시간이 있고 구김과 구겨짐 사이에는 구긴 것보다 더 구겨지거나 덜 구겨지는 시간이 있다. 수동이라는 관계와 시간이라는 흐름. 시선을 동선이 되게 하는 수동/시간이 있다.
부정/잠재
‘노동’의 사전 정의는 “몸을 움직여 일을 함”, “사람이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얻기 위하여 육체적 노력이나 정신적 노력을 들이는 행위”다(표준국어대사전 ‘노동’ 항목 내용 참고). 몸을 움직이는 데서 나아가 몸과 마음의 노력이 필요한 일. 즉 ‘힘씀’을 전제한다. 무엇인가를 ‘하는’ 것은 곧 힘쓰는 일이다. ‘하다’라는 동사는 할 수 있는 가능성과 해야 하는 의무를 파생한다. 하지 않거나 할 수 없거나 못 하겠는 부정의 의지도 파생한다. 결국 한다는 것. 그것은 눈을 쓰고 손을 쓰고 머리를 쓰고 몸을 쓰는 일이다. 마음을 쓰는 일이고 힘을 쓰는 일이다. 김기훈은 이렇게 힘쓰는 일에서 힘을 덜어내는 일에 나선다. 힘을 덜어내는 일은 일을 덜어내는 일이 아닌가. “무엇이 노동이 아닌가”라고 묻는 작가는 “노동을 덜어내는 노동”이라고 답한다. 노동이 아닌 것이 노동을 덜어내는 노동이라면, 그런 노동은 하기보다 ‘하지 않기를 선호하는 것’일 테다. 하지 않기를 선호하는 사람은 하지 않음으로써 되지 않을 수 있다. 하지 않을 능력을 발휘해 되지 않을 능력을 보존한다. 일을 덜어내는 일. 하지 않을 능력의 발휘. 되지 않을 잠재성의 보존. ‘무엇이 노동이 아닌가’의 어떤 정의다.
지체/재촉
셔터를 누르는 순간은 볼 것을 지체하는 만큼 재촉한다. 볼 것을 지체하고 재촉하는 것은 힘쓰는 일이다. 본 것이 무엇인지 이야기(해야) 하는 시선의 의무를 진다. 셔터를 누르기 전 대답을 망설이듯 숨죽인 시간은 사진을 ‘지체’하는 한편 어서 찍어야/찍혀야 하는 순간을 ‘재촉’한다. 어쩌다 찍힌 사진은 어쩌다 셔터가 눌린 순간이다. 어쩌다 눌린 셔터는 볼 것을 지체하거나 재촉하지 않고, 그헣게 본 것은 지체되거나 재촉되지 않는다. 힘쓰지 않고 시선의 의무를 지지 않는 사진. 어쩌다 찍힌 사진은 보는 노동을 덜어내는 사진이 된다. 그럼 이런 사진은 어떤가. 어쩌다 찍힌 상처를 찍은 사진(<영광>)말이다. 지난해 주류 유통회사에서 술 짝 나르는 일을 한 작가는 술 짝을 짊어진 몸의 균형을 찾다가 상처를 얻었다. 어쩌다 찍힌 상처를 발견한 눈은 카메라를 들고 셔터를 누른다. 영광은 재촉하고 지체한다. 술 짝을 나른 작가는 “나는 왜 이 술 짝을 기어이 들고자 했는가”라고 묻는다. “감당”은 덜어내기보다 더하는 일. 술 짝을 기어이 드는 일이다. 작가는 기어이 술 짝을 들다가 찍힌 상처를 사진 찍고 ‘영광’이라 이름 붙였다. 균형과 불균형 사이에 슬래시를 넣듯 상처가 남았고 상처를 남긴 사진이 남았다. 그리고 그것은 영광이 됐다. 우연을 이야기는 사진이 덜어내는 노동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영광은 얼마나 가벼울까. 우연히 찍히는 대신 우연히 보인 장면을 담는 사진의 시선은 지체된 우연을 재촉한다. 지체된 우연을 찍는 순간은 재촉된다. 그럼 이렇게 찍힌 사진은 보는 노동을 덜어낼 수 있을까. 덜어낸다면 얼마나 덜어낼 수 있을까. 어쩌다 찍힌 상처는 어쩌다 찍힌 사진이 아니지만 상처의 우연성은 우연치 않은 사진의 잔해다.
사진/조각
김기훈은 술 짝 나르는 일을 하며, 술 짝이 질서정연하게 쌓아 올려진 모습을 촬영했다(<주4일제>). 초록과 파랑이 선명한 술 짝들이 반듯하고 가지런하게 쌓아올려진 모습을 대형 인화한 사진은 둥글게 말려 세워지거나, 술 짝이 쌓아올려진 모습대로 세워올려진 다음 윗부분이 구겨진 채 전시됐다(<참을 수 있는 것과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 앞선 전시에서 김기훈이 선보인 사진-조각은 이번 전시의 사진-조각을 예견한다. 앉아서 술 짝을 짊어진 다음 일어서 걸음을 옮겨 다른 데 술 짝을 옮겨두는 움직임은 술 짝의 무게와 술 짝의 무게를 견디는 작가의 몸과 술 짝이 쌓아올려진 모습을 함축한다. 술 짝 운반 노동에서 작업의 영감을 얻는 작가는 예술노동과 비예술노동의 구분을 묻지 않을 수 없는 삶에서 노동이 아닌 것을 묻는 한편 노동의 무게를 달리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매체로 나아간다. 평면의 깊이가 추상적이라면 입체의 깊이는 구체적이다. 원통형으로 또는 (일그러진) 육면체로 세워진 사진은 사진이 둘러싼 내부 공간의 텅 빔을 무게로 환원한다. 가벼운 조각의 무게는 노동의 무게고, 작가가 노동이 아닌 것을 묻고 답하는 사유의 무게다. 물리적으로 무겁지 않지만 정서적으로 무거운 무게. 작업 밖 현실의 무게가 작업 안 현실의 무게로 넘어온다. 조각의 무게와 사진의 무게를 비교한다면 어떨까/가능할까. 사진은 종이에 인화되고 종이는 유연하다. 휘어지고 구겨진 사진은 미미하게 움직인다. 휘어져 쫄대에 끼워진 사진은 쫄대에 붙잡힌 힘과 쫄대를 벗어나려는 힘을 오가고 구겨져 좌대 위에 놓인 사진은 조금씩 더 구겨지거나 덜 구겨진다(펴진다). 휘어지고 구겨진 사진을 보자. 드러나고 튀어나오는 부분과 감춰지고 들어가는 부분이 있다. 드러나고 튀어나오는 만큼 감춰지고 들어가는 것. 드러나고 튀어나오는 것보다 더 감춰지고 들어가는 것, 드러나고 튀어나오는 것보다 덜 감춰지고 들어가는 것. 들어가고 튀어나오며 드러나고 감춰지는 상호작용은 휘어지고 구겨진 것의 안팎에서 일어난다. 시선을 동선이 되게 하는 사진-조각은 동선을 시선이 되게 하는 조각-사진이 된다.
능동은 수동과 피동을, 작용은 반작용과 부작용을 전제한다. 세우거나 쓰러지지 않고 구겨진 사진들은 이렇게 관계의 문제를 가늠한다. 세움과 서 있음, 쓰러뜨림과 쓰러짐, 구김과 구겨짐. 균형과 불균형 사이에서 어쩌다 찍힌 자리를, 세우다 말고 쓰러지다 말고 구겨지는 자리를 찾는다. 그 자리에서 사진은 조각이 된다. 구겨진 조각은 굳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움직여진다.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움직여지는 사진-조각은 구긴 만큼 구겨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 미미하게 더 구겨지거나 덜 구겨진다. 노동이 무엇인지 묻다가 무엇이 노동이 아닌지 묻고 일을 덜어내는 일로 답한 사진은 가장 작은 움직임의 담지자가 된다. 모두 덜어내고 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덜어내고 남은 만큼 존재하는 가능성. 부정하는 만큼 긍정하는 일은 움직여지는 만큼 움직인다. 움직여지는 만큼 움직이는 사진은 사진이 조각이 되고 조각이 사진이 되는 잠재성을 보존한다.
잠재성이 보존되는 여분을 표시하려 슬래시를 넣고 생각했다. ┃이 아니라 /. 두 눈처럼 두 손처럼 함께 작용하는 것들을 다시 보는 것은 두 눈과 두 손 사이에 반듯한 벽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두 눈과 두 손이 서로 기대는 모습을 그려보는 것이 아닐까. 어쩌다 찍힌 사진을 보는 눈은 우연과 의지 사이에 머물고, 사진을 구기는 손은 사진과 조각 사이에 머문다. 어쩌다 찍히고, 구긴 것보다 더/덜 구겨지고 있을 사진에서 보이는 것은 무엇이고 되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했다. 보려 한 만큼 볼 수 없고 되려 한 만큼 될 수 없는 것이 보존되는 잠재성. 보지 않은 만큼 보이고 구긴 것보다 더/덜 구겨지는 것의 미래를, 아직 실현되지 않았고 앞으로도 실현되지 않을 잠재성을 생각했다.
평론가 한승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