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분명 이상한 매체다. 혹은 장치이자 기계, 무엇이라 부르든 사진은 단순히 정의되지 않는다. 기계적 기록이라고 하기에 그것이 남기는 흔적은 지나치게 주관적이며 쉽게 균열을 드러낸다. 빛과 어둠, 시간과 시선의 조건에 따라 매번 다른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카메라가 대상/세계를 그대로 가져올 리 만무하다. 그렇게 사진은 늘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겠다고 약속하면서도, 동시에 그 ‘있는 그대로’라는 환영을 무너뜨린다. 이 모순에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전환되고, 동일한 대상조차 매 순간마다 다른 형상으로 등장한다. 결국 사진은 분명한 사실이 아닌 세계와 관찰자가 맺는 관계 안에서, 그 관계가 끊임없이 변주되는 경계에서 오히려 분명해지곤 한다.
김기훈의 개인전 《0, 0, 0》은 이러한 사진 매체의 역설을 마주한다. 이상한 매체의 속성을 말해보는 시도는 말 그대로 괴상한 일이 되기 십상이다. 서문에 따르면 전시는 실재하지 않는 ‘어둠’을 통해 비-이원적 사고와 시각을 비춰보고자 한다. 전시는 왜 굳이 어둠을 불러내는가? 이 어둠을 비추는 역설은 작가가 말하는 이원적 사고를 어떤 방식으로 재고하며, 사진과는 어떤 관계를 맺는가? 전시 제목 《0, 0, 0》은 24비트 색광에서 표현되는 어둠을 의미한다. 제목은 빛의 부재, 즉 실재하지 않는 상태로서만 감각될 수 있는 어둠을 매개로, 사진이라는 매체가 지닌 인식론적 조건을 다시 묻겠다는 일종의 자기 선언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빛’이 있어야만 존재하는 사진/매체로 그 빛이 닿지 않는 자리에서 오히려 사진의 진실이 드러난다고 말하려는 것일까. 그렇다면 어둠은 단순한 결핍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하게 하고, 동시에 ‘있는 그대로’라는 환영을 무너뜨리는 균열의 자리가 되겠다. 김기훈이 말하는 어둠은 빛과 어둠, 재현과 부재, 동일성과 차이라는 이항 대립의 구도를 흔들며, 사진/이미지를, 무언가를 보고 생각하는 행위를 쉽게 규정할 수 없는 지대로 가져가 본다.
전시장에 들어선 관객은 전시장에 직립한, 원통형 기둥 모양의 거대한 흑백 사진들을 마주하게 된다. 둥근기둥들은 모두 숲을 찍은 흑백 풍경으로 감싸져 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벽에 걸린 ‘평면 이미지’가 아니라, 실제로 공간 속에 솟아오른 숲의 나무나 풍경처럼, 혹은 기둥처럼 자리한다. 여기서 사진은 하나의 ‘대상’이 되고, 관람자는 그 사이를 거닐며 다양한 각도에서 ‘대상/이미지’와 마주한다. 정면에서 완결된 장면을 확보할 수 없는 대신, 시선은 기둥을 돌며 흩어지고 다시 모인다. 사진은 고정된 응시 속에서 확인되는 것이 아니라 공간을 걷고 맴도는 움직임을 통해 지각되는 것이다. 이 움직임은 미세하지만 분명한 이미지의 균열과 지연을 감각하게 한다. 기둥의 표면을 덮은 풍경은 단일한 시점을 허락하지 않고, 관람자는 부분적인 조각들을 이어 붙이며 세계가 결코 하나의 완전한 시각으로 환원되지 않음을 인지한다. 그렇게 이 흙 백 기둥/사진/대상들은 빛이 닿는 면과 닿지 않는 면을, 드러남과 은폐를 교차시키며 사진이 더 이상 ‘한 장의 기록’으로 고정되지 않음을 진술한다. 오히려 그것은 관람자의 이동과 시선 속에서 매번 달리 구성되는 관계적 풍경을 연출한다. 장면을 소유할 수 없고, 끊임없이 다시 조율하고 이어 붙여야 하는 관람의 경험은 결국 사진을 단순히 세계를 기록하는 기계적 매체가 아니라, 빛과 어둠, 여러 움직임, 그리고 공간적 맥락이 교차하며 생성되는 하나의 사건으로 인지케 한다. 이처럼, 전시는 이 사건의 극대화로, 평면을 넘어선 입체적 감각으로 사진 매체가 지닌 모순과 역설을 직접 경험하게 한다.
같은 맥락에서 둥근기둥 표면에 난 사진의 접점(이음새)을 의미심장하게 말해본다. 각각의 원기둥 사진은 나무가 절반쯤 끊겨 이어지거나 숲의 결이 어긋나는 등, 한 장의 사진/기둥에 (사실은 한 장면이지만) 마치 다른 두 개의 장면이 만나는/어긋나는 것 같은 상황을 연출한다. 일반적으로 사진/설치에서 감춰질 법한 이 경계는 김기훈의 작업에서 불완전한 봉합의 강조처럼 제시된다. 숲의 연속성이 한순간 끊어지고 다시 이어지는 이음새는 단순한 오류가 아니라 하나의 표식처럼 관객의 시선에 포착된다. 이 접점은 분명 기술적 한계의 흔적이 아니라, 사진이 평면에서 공간으로 확장될 때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모종의 ‘틈’을 시각화하는 듯하다. 따라서 관람자는 숲의 풍경에 몰입하는 대신 그것이 어디까지나 잘라 붙여진 이미지의 조각, 즉 인위적인 구성물이라는 사실을 의식하게 된다. 다시, 작업은 자연을 재현하기보다, 재현의 인위성과 불가능성을 드러내는 시도로 독해된다.
이러한 이미지의 기능과 인식의 전환은 사진에 관한 오랜 질문을 환기한다. 사진은 주로 ‘빛’의 흔적을 담아내는 기술이다. 기계적으로도 빛이 닿아야만 피사체는 드러나고, 빛이 사라지면 아무것도 기록되지 않는다. 그러나 김기훈은 그 반대편, 즉 부재의 상태를 사진의 주제로 삼는다. 설명했듯, 전시에서 ‘어둠’은 단순히 결여가 아니라, 사진의 인식론적 조건을 가시화하는 개념으로 호출된다. 이는 바르트가 『밝은 방』에서 언급한 ‘죽음의 현존’이라는 사진적 속성과도 교차될 것이다. 빛이 포착된 순간이 곧 사라진 과거의 흔적이라면, 김기훈이 제시하는 어둠은 포착되지 않은 잔여, 즉 보이지 않음 속에서 여전히 잠재로 머무는 또 다른 세계를 가리키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사진의 어둠은 오히려 관람자의 상상과 사유를 불러내는 잠재적 공간이 된다. 전시장에 배치된 원통 사진들은 언뜻 숲과 나무, 호수의 풍경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원통에 나타난 접점(이음새)이 보여주듯 그것은 특정 장소의 기념비적 재현이 아니라, ‘빛과 어둠 사이를 떠돌며’ 기록한 일종의 빗나간 이미지들은 아닐까. 사진은 언제나 무언가를 기록하거나 증명하려는 충동을 수반하지만, 김기훈은 그 충동을 빛과 어둠 사이의 이미지와 다시 충돌시킨다.
이처럼 작가는 사진의 근본적 이원성을 비판적으로 또 자조적으로 사고한다. 사진은 본래 빛과 어둠, 보임과 부재, 실재와 허상이라는 이항대립 위에서 구조를 형성해 왔다. 작가는 이 대립의 어느 한쪽을 택하는 대신 그것들의 배경처럼 어둠을 호출하며 그 대립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순간, 즉 비이원적 지평을 가늠해 본다. 바로 이 어둠 속에서 관객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상상하게 될지도, ‘보이지 않는 것의 가시성’—그러니까 보임의 조건으로서의 비가시적 차원—을 떠올리지도 모른다.
이 보이지 않는 것의 가시성은 전시에 포함된 또 다른 시리즈와도 연결된다. 이번 전시에서 같은 공간, 다른 벽에 걸린 두 점의 사진은 같은 장소를 반복해서 찍은 것이지만 조금 다른 장면을 드러낸다. 욕조와 가구, 벽의 흔적은 변하지 않았지만, 미세한 빛의 차이가 다른 얼굴을 부여한다. 그리고 이 차이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간극, 카메라와 피사체, 나와 타인 사이에 놓인 틈을 인지하게 한다. 하나의 방이 두 장의 사진으로 관객 앞에 놓이지만, 그것은 결코 같은 방이 아니다. 한 장에서는 창을 통과하지 못한 어둠이 공간 속 사물의 윤곽만 남기고, 다른 한 장에서는 빛이 스며들어 욕조와 가구를 상대적으로 분명하게 나타낸다. 같은 장소임에도 다른 이미지를 보여주는 이 작업은,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순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서로를 밀어내고 끌어안으며 만들어내는 사진의 이중성을 드러낸다. 그렇게 작가는 반복된 시선 속에서 미세한 차이를 포착하며, 우리가 세계를 바라본다는 것이 곧 끊임없이 변주되는 틈새와 마주하는 일임을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여기서 반복은 대상의 재현이 아니라 또 다른 생성의 동력이 된다. 동일성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미세한 차이를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동일한 대상을 다시 찍을 때마다 사진은 이전에 없던 세계를 새롭게 호출한다. 그렇게 작가는 다시 찍으며 우발성을 받아들이고, 실패와 어긋남을 반복하며 매체의 본질을 드러내 보인다. 그리고 이 드러남은 단순히 숨겨진 실체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보는 방식 자체가 변화했음을, 관람자의 인식 구조가 매번 다른 조건에서 작동함을 증언한다. 어둠과 빛은 서로를 배제하지 않고, 서로를 통해서만 의미를 얻는 것처럼, 같은 대상의 반복 촬영이 경계의 진동을 감각하게 하는 것이다.
결국 《0, 0, 0》은 사진의 본질적 속성―빛의 기록―을 전복적으로 사유함으로써, 그 한계 너머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모색한다. 전시가 시각화하는 ‘어둠’ 속에서 무언가를 상상하고, 빛 속에서 다시 그것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관람자는 이미지와 세계의 관계를 다시 사고할지 모른다. 전시에서 사진은 끊임없이 달라지고 흔들리는 관계의 흔적처럼 자리한다. 그 흔적은 때로 숲의 기둥처럼 관객들을 둘러싸고, 때로는 어두운 방처럼 닫혀 있다가 다시 빛 속에서 열리며 여러 신체들을, 또 다른 보기를 호출한다. 그러한 빛과 어둠의 진동 속에서 김기훈은 동일성 너머의 차이, 재현을 넘어서는 생성의 순간을 붙잡는다. 사진은 반복되지만 결코 같지 않고, 드러나지만 끝내 완결되지 않는다. 전시는 그 미묘한 차이의 공간 속에서 결코 명징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어둠 속에서 잠재적으로 빛나는 세계를 따라가는지도 모른다. 관객에게 ‘무엇을 보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묻게 하며, 이상한 매체, 기계 장치로서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바로 그 틈에서 가능성을 찾는다. 작가의 사진들은 결국 완결되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것들은 매번 어둠 속으로 가라앉거나, 다시 빛으로 떠오르며, 관람자의 눈앞에서 새로운 차이를 낳는다. 반복은 닫힌 세계를 열고, 부재 속에서 또 다른 존재를 소환한다. 그렇게 사진은 어떤 경계 위에서 끝없이 서성인다.
슬래시 : 세우거나 쓰러지지 않고 / 구겨진 ㅣ 평론가 한승은
비주류는 주류가 아니고(<비:주류>) 비정체성은 정체성이 아니다(<비 정체성의 초상화>). 없는 것이 아니라 아닌 것. 부정은 부재가 아니다. 아무것도 없지 않은 잔해(<아무것도 없지 않은 황량한 장소>, <형태 잃은 잔해>)는 없는 것이 아니라 없어지는 것, 없어지며 남겨지는 것이다. 소멸과 잔존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아닌 것과 남겨지는 것에 눈길이 가는 김기훈은 그렇게 형태를 잃어가고 사라져가는 것들에서, 부정되는 한편 부재하지 않는 것들을 발견한다. 전단지를 떼고 남은 테이프에서(<전단지 테이프>) “부재의 공간, 빈 공간, 사유의 공간이 사라져가는”(김들림) 것을 보는 눈은 없는 공간이 있는 공간이 되는 장면을 보는가 하면 공간의 있음에서 없음이 암시되는 장면을 본다. 없는 공간이 있는 공간이 되는 한편 공간의 있음이 없음을 암시하는 장면은 오래 보아야 보이는 것. 사유하며 보고 보며 사유하기를 거듭하는 김기훈의 사진은 의미를 담고, 의미를 담는 눈은 순간에서 시간으로 다시 시간에서 순간으로 넘어온다. 어쩌다 찍힌 사진에서 순간을 보는가 하면 이 사진이 구겨진 조각에서 시간을 보는 눈. 능동과 피동 사이에 수동이 있다면, 어쩌다 찍힌 순간과 그 순간을 발견하는 순간 사이에는 어쩌다 찍힘이 지속하는 시간이 있고 구김과 구겨짐 사이에는 구긴 것보다 더 구겨지거나 덜 구겨지는 시간이 있다. 수동이라는 관계와 시간이라는 흐름. 시선을 동선이 되게 하는 수동/시간이 있다.
부정/잠재
‘노동’의 사전 정의는 “몸을 움직여 일을 함”, “사람이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얻기 위하여 육체적 노력이나 정신적 노력을 들이는 행위”다(표준국어대사전 ‘노동’ 항목 내용 참고). 몸을 움직이는 데서 나아가 몸과 마음의 노력이 필요한 일. 즉 ‘힘씀’을 전제한다. 무엇인가를 ‘하는’ 것은 곧 힘쓰는 일이다. ‘하다’라는 동사는 할 수 있는 가능성과 해야 하는 의무를 파생한다. 하지 않거나 할 수 없거나 못 하겠는 부정의 의지도 파생한다. 결국 한다는 것. 그것은 눈을 쓰고 손을 쓰고 머리를 쓰고 몸을 쓰는 일이다. 마음을 쓰는 일이고 힘을 쓰는 일이다. 김기훈은 이렇게 힘쓰는 일에서 힘을 덜어내는 일에 나선다. 힘을 덜어내는 일은 일을 덜어내는 일이 아닌가. “무엇이 노동이 아닌가”라고 묻는 작가는 “노동을 덜어내는 노동”이라고 답한다. 노동이 아닌 것이 노동을 덜어내는 노동이라면, 그런 노동은 하기보다 ‘하지 않기를 선호하는 것’일 테다. 하지 않기를 선호하는 사람은 하지 않음으로써 되지 않을 수 있다. 하지 않을 능력을 발휘해 되지 않을 능력을 보존한다. 일을 덜어내는 일. 하지 않을 능력의 발휘. 되지 않을 잠재성의 보존. ‘무엇이 노동이 아닌가’의 어떤 정의다.
지체/재촉
셔터를 누르는 순간은 볼 것을 지체하는 만큼 재촉한다. 볼 것을 지체하고 재촉하는 것은 힘쓰는 일이다. 본 것이 무엇인지 이야기(해야) 하는 시선의 의무를 진다. 셔터를 누르기 전 대답을 망설이듯 숨죽인 시간은 사진을 ‘지체’하는 한편 어서 찍어야/찍혀야 하는 순간을 ‘재촉’한다. 어쩌다 찍힌 사진은 어쩌다 셔터가 눌린 순간이다. 어쩌다 눌린 셔터는 볼 것을 지체하거나 재촉하지 않고, 그렇게 본 것은 지체되거나 재촉되지 않는다. 힘쓰지 않고 시선의 의무를 지지 않는 사진. 어쩌다 찍힌 사진은 보는 노동을 덜어내는 사진이 된다. 그럼 이런 사진은 어떤가. 어쩌다 찍힌 상처를 찍은 사진(<영광>)말이다. 지난해 주류 유통회사에서 술 짝 나르는 일을 한 작가는 술 짝을 짊어진 몸의 균형을 찾다가 상처를 얻었다. 어쩌다 찍힌 상처를 발견한 눈은 카메라를 들고 셔터를 누른다. 영광은 재촉하고 지체한다. 술 짝을 나른 작가는 “나는 왜 이 술 짝을 기어이 들고자 했는가”라고 묻는다. “감당”은 덜어내기보다 더하는 일. 술 짝을 기어이 드는 일이다. 작가는 기어이 술 짝을 들다가 찍힌 상처를 사진 찍고 ‘영광’이라 이름 붙였다. 균형과 불균형 사이에 슬래시를 넣듯 상처가 남았고 상처를 남긴 사진이 남았다. 그리고 그것은 영광이 됐다. 우연을 이야기하는 사진이 덜어내는 노동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영광은 얼마나 가벼울까. 우연히 찍히는 대신 우연히 보인 장면을 담는 사진의 시선은 지체된 우연을 재촉한다. 지체된 우연을 찍는 순간은 재촉된다. 그럼 이렇게 찍힌 사진은 보는 노동을 덜어낼 수 있을까. 덜어낸다면 얼마나 덜어낼 수 있을까. 어쩌다 찍힌 상처는 어쩌다 찍힌 사진이 아니지만 상처의 우연성은 우연치 않은 사진의 잔해다.
사진/조각
김기훈은 술 짝 나르는 일을 하며, 술 짝이 질서정연하게 쌓아 올려진 모습을 촬영했다(<주4일제>). 초록과 파랑이 선명한 술 짝들이 반듯하고 가지런하게 쌓아올려진 모습을 대형 인화한 사진은 둥글게 말려 세워지거나, 술 짝이 쌓아올려진 모습대로 세워올려진 다음 윗부분이 구겨진 채 전시됐다(<참을 수 있는 것과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 앞선 전시에서 김기훈이 선보인 사진-조각은 이번 전시의 사진-조각을 예견한다. 앉아서 술 짝을 짊어진 다음 일어서 걸음을 옮겨 다른 데 술 짝을 옮겨두는 움직임은 술 짝의 무게와 술 짝의 무게를 견디는 작가의 몸과 술 짝이 쌓아올려진 모습을 함축한다. 술 짝 운반 노동에서 작업의 영감을 얻는 작가는 예술노동과 비예술노동의 구분을 묻지 않을 수 없는 삶에서 노동이 아닌 것을 묻는 한편 노동의 무게를 달리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매체로 나아간다. 평면의 깊이가 추상적이라면 입체의 깊이는 구체적이다. 원통형으로 또는 (일그러진) 육면체로 세워진 사진은 사진이 둘러싼 내부 공간의 텅 빔을 무게로 환원한다. 가벼운 조각의 무게는 노동의 무게고, 작가가 노동이 아닌 것을 묻고 답하는 사유의 무게다. 물리적으로 무겁지 않지만 정서적으로 무거운 무게. 작업 밖 현실의 무게가 작업 안 현실의 무게로 넘어온다. 조각의 무게와 사진의 무게를 비교한다면 어떨까/가능할까. 사진은 종이에 인화되고 종이는 유연하다. 휘어지고 구겨진 사진은 미미하게 움직인다. 휘어져 쫄대에 끼워진 사진은 쫄대에 붙잡힌 힘과 쫄대를 벗어나려는 힘을 오가고 구겨져 좌대 위에 놓인 사진은 조금씩 더 구겨지거나 덜 구겨진다(펴진다). 휘어지고 구겨진 사진을 보자. 드러나고 튀어나오는 부분과 감춰지고 들어가는 부분이 있다. 드러나고 튀어나오는 만큼 감춰지고 들어가는 것. 드러나고 튀어나오는 것보다 더 감춰지고 들어가는 것, 드러나고 튀어나오는 것보다 덜 감춰지고 들어가는 것. 들어가고 튀어나오며 드러나고 감춰지는 상호작용은 휘어지고 구겨진 것의 안팎에서 일어난다. 시선을 동선이 되게 하는 사진-조각은 동선을 시선이 되게 하는 조각-사진이 된다.
능동은 수동과 피동을, 작용은 반작용과 부작용을 전제한다. 세우거나 쓰러지지 않고 구겨진 사진들은 이렇게 관계의 문제를 가늠한다. 세움과 서 있음, 쓰러뜨림과 쓰러짐, 구김과 구겨짐. 균형과 불균형 사이에서 어쩌다 찍힌 자리를, 세우다 말고 쓰러지다 말고 구겨지는 자리를 찾는다. 그 자리에서 사진은 조각이 된다. 구겨진 조각은 굳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움직여진다.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움직여지는 사진-조각은 구긴 만큼 구겨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 미미하게 더 구겨지거나 덜 구겨진다. 노동이 무엇인지 묻다가 무엇이 노동이 아닌지 묻고 일을 덜어내는 일로 답한 사진은 가장 작은 움직임의 담지자가 된다. 모두 덜어내고 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덜어내고 남은 만큼 존재하는 가능성. 부정하는 만큼 긍정하는 일은 움직여지는 만큼 움직인다. 움직여지는 만큼 움직이는 사진은 사진이 조각이 되고 조각이 사진이 되는 잠재성을 보존한다.
잠재성이 보존되는 여분을 표시하려 슬래시를 넣고 생각했다. ┃이 아니라 /. 두 눈처럼 두 손처럼 함께 작용하는 것들을 다시 보는 것은 두 눈과 두 손 사이에 반듯한 벽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두 눈과 두 손이 서로 기대는 모습을 그려보는 것이 아닐까. 어쩌다 찍힌 사진을 보는 눈은 우연과 의지 사이에 머물고, 사진을 구기는 손은 사진과 조각 사이에 머문다. 어쩌다 찍히고, 구긴 것보다 더/덜 구겨지고 있을 사진에서 보이는 것은 무엇이고 되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했다. 보려 한 만큼 볼 수 없고 되려 한 만큼 될 수 없는 것이 보존되는 잠재성. 보지 않은 만큼 보이고 구긴 것보다 더/덜 구겨지는 것의 미래를, 아직 실현되지 않았고 앞으로도 실현되지 않을 잠재성을 생각했다.
예술가의 노동, 예술가로 살아가기 ㅣ평론가 이슬비
모든 예술가는 경제적 걱정 없이 작업하기를 원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다. 예술가 대부분은 예술 활동만으로 생계를 유지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다른 밥벌이를 하기도 한다. 예술가들이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것은 한국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와 연동될 것이다. 하지만 한국만의 현실은 아니다. 오죽하면 한 비평가는 예술가에게 부업은 ‘숙명’이라고 말했을까?
그렇다면 예술가들은 창작과 일상의 관계를 어떻게 조율하는가? 김기훈의 이번 작업은 ‘예술적 노동과 경제적 노동 사이의 균형은 가능한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현재 작가는 예술 활동 외에 경제 활동을 위해 생업을 병행한다. 지난 1여 년간 주 4일 고용 조건으로 주류 유통업에 종사하며 나머지 3일은 작업과 기획 등의 예술 활동을 해왔다.
처음에는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잘 분배하면 될 문제라고 생각했다.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안배도 적절해 보였다. 하지만 그 둘 사이에서 균형 잡기는 절대 쉽지 않았다. 아니 얼마 지나지 않아 균형 잡힌 삶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 4일간 노동의 강도는 너무 강했고, 한동안 육체적 피로 때문에 머리 쓰는 일조차 벅찼다. 그는 균형을 찾기보다 노동의 균형이 어긋나는 지점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이번 작업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노동의 물리적인 중량감이다. 작가는 주류 유통업을 위해 한꺼번에 술 여러 짝을 등에 지고 옮기는 일을 한다. 이때 몸은 육중한 무게를 감당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필사적으로 중심을 잡으려고 한다. 하지만 늘 성공적인 것은 아니다. 때로는 손과 팔, 다리에 짓눌린 상처가 남기도 한다. 그 흔적을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촬영한 것이 바로 <영광>이다. 이 작업은 그가 고투하다 중심을 잃어버린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7점의 사진으로 이루어진 <주4일제>는 두 가지 방식으로 촬영되었다. 우선 작가가 회사에서 노동한 결과물인 술 통과 술 짝이 차곡차곡 쌓인 모습으로 묵직한 무게감을 전달한다. 그리고 나머지 사진은 고된 노동 끝에 휴식을 취하며 울타리 넘어 먼 풍경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담아낸다. 이 사진에서 근거리의 풍경은 희미하게 오히려 먼 곳의 풍경은 선명하게 포착된다. 이 작업은 생활하는 예술가인 그의 일주일 일과를 함축한다. 실제로는 회사에 출근하는 날과 그렇지 않은 날로 나뉘며 시공간이 명확하게 분리되지만, 사진에서는 안과 밖의 관계는 고정된 채 교묘하게 한 덩어리로 맞물려 있다. 눈에 띄게 달라지는 것은 단지 초점을 어디에 맞추냐의 문제이다.
그렇다면 그의 삶에서 회사의 노동과 예술 활동의 관계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수익 창출의 개념으로 보자면 술 짝을 옮기는 노동과 먼 곳을 바라보는 여가 같은 예술 활동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하지만 작가는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술 짝을 질서정연하게 쌓고 나서 균형 잡힌 그리드와 볼륨감을 볼 때 통해 때로는 미적 희열을 느끼며 회사에서 육체노동을 하는 그 순간이 오히려 머리를 비우는 휴식의 시간이 된다고 말했다. 뜻밖에 미적 경험과 노동, 휴식의 개념이 반대로도 작동하는 것이다.
사실 예술과 노동을 뚜렷하게 구분하기는 어렵다. 예술은 노동의 창조적 잠재성을 실현하는 활동이고, 노동은 예술의 창조적 가치를 생산하는 중요한 조건이라는 점에서 예술과 노동은 연결되어 있으며 상호 보완적이다. 그렇다고 예술이 노동의 등가물은 아니다. 예술가에게 창작은 노동의 일부이지만, 미적 가치를 생산한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노동을 초과하는 특수한 노동에 해당한다. 예술과 노동은 연결되면서도 때로는 다른 층위의 문제라 할 수 있다.
<영광>에서 예술과 노동의 문제는 다른 차원으로 변주된다. 반복되는 상처는 인간적으로 나약함을 의미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맞서겠다는 의지의 다른 표현이다. 아이로니컬하게도 고통의 흔적이 쾌락의 시간과 겹친다. 그는 상처를 작업의 대상으로 촬영하기 시작하면서 상처가 나기를 마치 기다렸다는 사람처럼 즐겁게 촬영했다고 말했다. ‘영광’이라는 모순적인 제목이야말로 바로 상처가 고통에서 쾌락으로 도약하는 유희적인 측면을 말해준다.
<누가 웅덩이에 자갈을 채웠는가>는 유일한 흑백사진으로 어떤 길을 무심하게 찍은 사진처럼 보이지만 작가의 경험을 단서로 한다면 의미심장하다. 이 사진은 주류 유통회사의 입구 근처의 포장도로와 비포장도로의 경계에 해당한다. 작가는 이곳을 매번 지날 때마다 마음을 다잡으며 예술가와 주류 유통업자 사이를 오가는 관문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두 도로의 차이를 흑백톤으로 모호하게 만들었다.
사진을 들여다보면 경계 지점에 미묘한 틈새와 자갈 알갱이들이 눈에 띈다. 술 짝을 가득 실은 트럭이 이곳을 지날 때마다 그 무게에 짓눌려 움푹 패는 현상이 종종 발생한다. 때로는 낙차 때문에, 트럭에 실린 술 짝의 열이 흐트러지거나 술병 일부가 튕겨 날아가기도 한다. 이러한 이유로 작가는 차량이 원활하게 다닐 수 있도록 회사 직원 중 누군가가 웅덩이 같은 틈새를 자갈로 채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작가는 입구와 출구, 안과 밖, 예술 노동과 경제 노동 등 그동안 이원적으로 판단했던 균형의 관계를 작용과 반작용 사이에 무게 중심의 문제로 인식하게 되었다. 무거운 것은 단지 술 짝만이 아니다. 예술가라는 이름으로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가 때로 버겁기도 하지만 지금 여기에 계속 살아 있도록 붙들어 매는 힘이기도 하다. 예술가에게 노동은 예술가로서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이다.
작업의 배경을 알고 나면 다소 밋밋하고 고요한 이 사진이 다르게 보이며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느껴질지 모른다. <참을 수 있는 것과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에서는 그러한 긴장 관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작가는 술 짝을 벽처럼 견고한 모습으로 쌓은 사진을 거대한 크기로 출력하고 둥글게 말아 기둥처럼 설치한다. 단단하게 고정된 것 같지만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부동의 이미지이지만 찰나일 수밖에 없는 사진의 양면적인 속성을 잘 보여준다.
기존의 인물 초상 작업에서 타인의 무의식을 포착했던 카메라는 이번에는 자신의 무의식을 끄집어내는 도구가 되었다. 하지만 무거운 술 짝을 들어올려야 하는 그 순간에는 어떠한 새로운 감각도 경험할 수 없었다. 무의식이 들어올 틈도 없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작업에 대한 사유는 술 짝을 내려놓고 나서 나를 돌아보고 주변을 둘러볼 때야 비로소 가능했다. 이번 작업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자신의 짓눌려진 몸을 통해 사유함으로써 작가 자신이 처한 리얼리티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여기에는 피 냄새, 땀 냄새, 살 냄새가 물씬 배어 있다.
그동안 예술가에게 생업은 예술에 비해 부차적이며 주름 안으로 숨겨진 삶의 일부에 가까웠다. 김기훈의 작업은 단순히 자신의 노동을 작품의 소재나 모티프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작업의 문제의식으로 만들어 예술과 노동에 대한 지배적인 인식의 바깥을 보여준다. 특히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 소외된 노동과 억압된 무의식을 연결한다. 작가는 <어쩌다 찍힌 사진>에서 언제 어떻게 찍었는지 알 수 없는 우연히 찍혀 휴대폰에 저장된 사진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 사진이 어떠한 계획이나 의도 없이 찍혔다는 점에서 무언의 해방감을 느꼈다고 했다.
이 사진은 니콜라 부리오의 ‘엑스폼(exform)’의 개념을 연상시킨다. ‘exform’은 문자 그대로 형식으로부터 벗어난 것으로, 모든 것을 유용성의 기준으로 재편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배제와 포용의 이분법에서 가치 없고 쓸모없는 존재로 여겨지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또한 포함과 배제의 분류가 이루어지는 영역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 체계를 교란하고 전복할 수 있는 변혁의 지점이기도 하다. 사실상 작가는 그저 휴지통 버튼을 눌러 삭제하면 그만인 이미지를 건져 올려 작업으로 내세운다. 더 이상 예술 사진은 이래야 한다는 강박도 없다. 사진에서는 춤추는 듯한 에너지의 역동성을 느낄 수 있다.
김기훈은 중력을 거스르는 노동을 하며 자본주의의 배제의 논리에 저항하고 카메라라는 기계 장치에 맞서며 유희하는 방식을 탐구한다. 하지만 예술의 문제는 단순히 역학적인 관계로 설명할 수 없다. 예술의 가능성은 예술가들의 삶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술가는 예술가로 살아가기 위해 예술이라는 자유의 영역을 기필코 확보하기 위해 예민하게 중심을 잡고 또 무모하게 잃어버리기를 반복하면서 자기 탄력성을 확보해 나간다. 살아있는 존재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
사진의 내면을 바라보다 ㅣ 평론가 이슬비
사진작가 김기훈은 2012년부터 2021년도까지 <비 정체성의 초상화>에 천착했다. 동일한 인물을 두 번에 걸쳐 촬영한 후 두 점의 사진을 나란히 배치하는 것은 그가 오랫동안 고심한 끝에 만들어낸 장치이다. 표면상으로 거의 비슷해 보인다. 인물은 거의 같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으며 약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연속 촬영된 사진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하나의 사진은 작가가 카메라의 셔터를 직접 누른 것이고 다른 하나의 사진은 2분에서 10분 정도의 간격을 두고 작가가 다른 공간에서 원격으로 촬영한 것이다. 작가의 존재와 부재 여부는 결과적으로 어떤 변화를 유발한 것일까?
작가는 처음부터 모델에게 익숙한 공간에서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는 편안한 자세를 취하도록 요청한다. 그리고 첫 번째 사진을 촬영하고 사라진다. 작가의 개입이 최대한 배제된 상태에서 모델은 몇 분간 가만히 카메라를 바라본다. 촬영 시간이 길어지면서 카메라 렌즈라는 한 점에 집중되었던 모든 감각은 분산되어 길을 잃은 채 헤매기 시작한다.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의 세계가 작동하는 것이다. 라캉식으로 말하자면 나는 한곳만을 바라보지만 동시에 모든 방향에서 보여진다.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보여지고 있는 나를 보게 된다. 즉 응시(regard)하는 것이다. 변화는 바로 그 지점에서 발생한다.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모델의 표정 변화다. 얼굴은 틀림없이 카메라를 의식하지만 묘하게 복잡한 양태를 보인다. 그렇다고 긴장감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다. 작가는 그 미묘한 순간을 찾아낸다.
사진에 찍히는 것은 자신이 한 장의 이미지가 되어 누군가의 눈앞에 보여지는 대상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롤랑 바르트는 그의 저서 『밝은 방』에서 카메라 렌즈 앞에서 나는,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고, ‘다른 이가 나라고 생각해주길 바라는 사람’이며, ‘사진작가가 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고, ‘그가 자신의 예술을 보여주기 위해 이용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바르트는 사진에 찍힐 때마다 자신이 진짜가 아니라는 느낌, 기만적이라는 느낌이 스쳐 간다면서 사진 찍히는 자의 분열된 상태를 ‘유령’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타인에 의해 판단되는 나’와 ‘고유한 나’는 다를 수밖에 없으며, ‘나 자신’ 사이에도 간극이 발생한다. 그렇다면 나 자신은 무엇일까? 그것은 과연 사진으로 포착할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결코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김기훈은 사진의 한계를 인정한다. 그럼에도 그는 카메라 너머 대상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다가가고자 한다.
특히 이 작업에서는 사진작가와 모델, 그리고 감상자의 상호관계가 중요하다. 우선 작가는 모델의 심리적인 변화에 전적으로 기대는 측면이 있다. 그는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지만 상황을 포착하기보다 모델의 상태 변화를 기다리는 쪽에 가깝다. 그의 작업에서 감상자는 또 다른 주체이다. 두 사진의 차이를 구별하는 중요한 키를 쥐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글을 쓰기 위해 왼쪽과 오른쪽 사진을 번갈아 가며 유심히 바라보다가 순간 놀라운 경험을 했다. 하나의 사진은 모델이 카메라 렌즈를 바라보는 것 같은데 다른 하나의 사진은 어느 순간 그가 카메라 렌즈 너머 미래에 자신을 바라볼 누군가를 지그시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틀림없이 과거의 한 장면인데 그가 현재의 나와 연결되는 느낌이 드는 건 도대체 무엇일까? 이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어쩌면 두 사진의 차이 그 자체보다 미묘한 차이를 발견하기 위해 감상자가 두 사진을 면밀하게 들여다보는 행위와 그 과정에서 마주하게 되는 경험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진은 기본적으로 시각의 영역에서 작동한다. 하지만 그에게 사진은 보이는 세계가 전부가 아닌 보이지 않는 저편을 보여주기 위한 도구이기도 하다. 무언가를 보는 행위는 눈의 감각적인 반응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이해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대상의 본질을 파편화시키고 하나의 상태로 고정한다. 어쩌면 사진의 숙명과도 같다.
이번 전시에는 동명의 영상 작업도 함께 출품된다. 이 영상은 처음부터 작가 없이 두 대의 카메라로 촬영되었다. 다섯 명의 인물 서로 간의 긴장감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영상이 시작되고 모델들은 일제히 심호흡하면서 촬영에 임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술렁이는 느낌은 잦아든다. 각자의 리듬에 맞춰 자연스럽게 호흡을 하기 때문이다. 인물들의 긴장감은 다소 완화되지만 순간 순간 미미한 흔들림은 계속된다. 이것이 바로 사진이 결코 담아낼 수 없는 장면이다. 고정된 이미지가 아니라 유동적인 이미지로 그들은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다.
김기훈의 기존 작업에서 관계의 상호작용은 지속해서 중요한 관심사였다. <맞바꾸기>(2015), <둘 사이>(2016)와 같은 초기작에서는 유학 생활의 답답한 심정을 바탕으로 타인과 소통 불가능한 상태를 드러내고자 했다. 그가 겪은 상실과 고립의 경험은 주변의 대상이 가진 가치를 입체적으로 바라보는 데 영향을 주었다. <전단지 스티커>(2019)에서는 거리 벽면에 광고 전단지가 떼어지고 남아 있는 청테이프를 통해 여러 겹의 압축된 시간을 발견하고, 존재와 부재 사이의 상호관계에 대한 사유로 나아간다. <소멸 가이드>(2020)에서도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공간이 아닌 여백처럼 느껴지는 공간에서 유의미한 발견을 하고자 했다.
이후 <부정함으로써>(2020)에서는 작가의 감정이입이나 의미 부여가 오히려 대상을 왜곡시킬 수 있다는 인식에 다다른다. 예술의 본질과 사진이라는 매체에 대한 고민이 깊어진 것도 이때쯤이다. <아무것도 없지 않은 황량한 장소>(2021)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일종의 고백과 같은 작업이다. 그는 기존에 촬영한 사진 중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정서가 잘 표현된 이미지를 거대한 크기로 출력해 둥글게 말아 기둥처럼 설치했다. 기둥은 단단하게 중심을 잡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얇은 종이로 이루어져 툭 치면 금세 울렁거리면서 쓰러질 수도 있다. 부동적인 이미지이지만 찰나일 수밖에 없는 사진의 무거우면서 가벼운 속성을 긴장 관계 속에서 하나의 독립된 이미지로 연출했다.
최근에 그는 자신의 생각을 작품에 담아내는 것보다 대상에 집중하는 방법을 탐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다양한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무엇을 하나로 정의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존중하려는 삶의 태도와도 같다. 이미지를 대량으로 소비하는 현실에서 사진의 가능성은 무엇일까? 우리는 사진을 통해 어떻게 타인의 내면을 의식하거나 자기 자신을 반성할 수 있을까? 그의 작업처럼 끊임없이 미세한 움직임을 바라보려는 섬세함과 유연함이야말로 우리가 지금 이 시대에 갖춰야 하는 덕목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