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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nge
2023
술 짝.

그냥 들기에는 무겁고, 들어 올려 균형이 맞춰지는 순간 가벼워진다.
삶의 무게는 어떤가.

나는 복잡하게 얽힌 여러 상황과 사건, 조건, 제한, 이유, 이야기들로 짓눌리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그 모든 것들의 균형을 맞추어 삶의 무게를 감당한다.

이것은 술 짝의 물리적 균형을 맞추는 것처럼 다분히 의도적으로 삶의 균형을 맞추려는 여러 시도와 노력으로서의 감당이다.

그렇다면 왜 나는 무게를 지려고 하는가.
들지 않으면 그만 아닌가.
왜 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가.
나는 왜 드는 것과 동시에 덜어내고 싶은 것인가.
드는 것은 균형을 잡기 위함인가.
균형을 잡는 방법에는 드는 것만이 전부인가.
나는 왜 무거운 무게를 지려 하는가.
나는 왜 무거운 무게를 가져와 등에 메고, 균형을 잡는 것인가.
나는 왜 그 무게 자체를 가볍게 하지 않았는가.
나는 왜 그 무거운 짐을 감당하려 했는가.

그러니까,
나는 왜 이 술 짝을 기어이 들고자 했는가.
Caisse à bouteille.

Il est lourd à soulever, mais il devient léger dès qu’on le soulève et atteint l'équilibre.
Quel est le poids de la vie ?

Je supporte le poids de la vie en essayant désespérément d'équilibrer toutes les situations, événements, conditions, limitations, raisons et histoires compliquées afin de ne pas être alourdi.

Il s'agit d'un processus composé de nombreuses tentatives et d'efforts visant à équilibrer intentionnellement la vie, tout comme l'équilibre physique d'un partenaire qui boit.

Alors pourquoi est-ce que j'essaie de porter du poids ?
N'est-ce pas suffisant si je ne le soulève pas ?
Pourquoi n'avais-je pas d'autre choix que de le soulever ?
Pourquoi est-ce que je veux soulever et perdre du poids en même temps ?
Est-ce que soulever des objets permet de maintenir l'équilibre ?
Est-ce que soulever le poids est le seul moyen d’atteindre l’équilibre ?
Pourquoi est-ce que je veux porter des poids lourds ?
Pourquoi est-ce que j'apporte des poids lourds, que je les porte sur mon dos et que je les équilibre ?
Pourquoi n'ai-je pas allégé le poids lui-même ?
Pourquoi ai-je essayé de supporter ce lourd fardeau ?

donc,
Pourquoi avais-je envie de prendre cette bouteille d'alcool ?
Bottle crate.

It is heavy to lift, but it becomes light as soon as you lift it and achieve balance.
What is the weight of life?

I carry the weight of life desperately trying to balance all the situations, events, conditions, limitations, reasons, and complicated stories so as not to be weighed down.

It is a process of many attempts and efforts to intentionally balance life, much like the physical balance of a drinking partner.

So why am I trying to carry weight?
Isn't it enough if I don't raise it?
Why did I have no choice but to lift it?
Why do I want to lift and lose weight at the same time?
Does lifting help you maintain balance?
Is lifting the weight the only way to achieve balance?
Why do I want to carry heavy weights?
Why do I bring heavy weights and carry them on my back and balance them?
Why didn't I reduce the weight itself?
Why did I try to carry this heavy burden?

SO,
Why did I want to take this bottle of alcohol?

참을 수 있는 것과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 사진 조각, 연작 1번, 200 x 2580 cm,  ⌀ 35 cm, 2023
참을 수 있는 것과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 사진 조각, 연작 1번, 200 x 4780 cm,  ⌀ 85 cm, 2023
참을 수 있는 것과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 사진 조각, 연작 1번, 200 x 4880 cm,  ⌀ 160 cm, 2023
주 4일제, 사진, 연작 70 x 100 cm (1, 2, 5, 6번), 50 x 70 cm (3, 4, 7번), 2023
누가 웅덩이에 자갈을 채웠는가, 사진, 100 x 100 cm, 2023
영광, 사진, 연작 6점, 27,9 x 42 cm, 2023
어쩌다 찍힌 사진, 사진, 100 x 150 cm, 2023




예술가의 노동, 예술가로 살아가기


모든 예술가는 경제적 걱정 없이 작업하기를 원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다. 예술가 대부분은 예술 활동만으로 생계를 유지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다른 밥벌이를 하기도 한다. 예술가들이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것은 한국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와 연동될 것이다. 하지만 한국만의 현실은 아니다. 오죽하면 한 비평가는 예술가에게 부업은 ‘숙명’이라고 말했을까?  

그렇다면 예술가들은 창작과 일상의 관계를 어떻게 조율하는가? 김기훈의 이번 작업은 ‘예술적 노동과 경제적 노동 사이의 균형은 가능한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현재 작가는 예술 활동 외에 경제 활동을 위해 생업을 병행한다. 지난 1여 년간 주 4일 고용 조건으로 주류 유통업에 종사하며 나머지 3일은 작업과 기획 등의 예술 활동을 해왔다.

처음에는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잘 분배하면 될 문제라고 생각했다.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안배도 적절해 보였다. 하지만 그 둘 사이에서 균형 잡기는 절대 쉽지 않았다. 아니 얼마 지나지 않아 균형 잡힌 삶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 4일간 노동의 강도는 너무 강했고, 한동안 육체적 피로 때문에 머리 쓰는 일조차 벅찼다. 그는 균형을 찾기보다 노동의 균형이 어긋나는 지점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이번 작업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노동의 물리적인 중량감이다. 작가는 주류 유통업을 위해 한꺼번에 술 여러 짝을 등에 지고 옮기는 일을 한다. 이때 몸은 육중한 무게를 감당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필사적으로 중심을 잡으려고 한다. 하지만 늘 성공적인 것은 아니다. 때로는 손과 팔, 다리에 짓눌린 상처가 남기도 한다. 그 흔적을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촬영한 것이 바로 <영광>이다. 이 작업은 그가 고투하다 중심을 잃어버린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7점의 사진으로 이루어진 <주4일제>는 두 가지 방식으로 촬영되었다. 우선 작가가 회사에서 노동한 결과물인 술통과 술 짝이 차곡차곡 쌓인 모습으로 묵직한 무게감을 전달한다. 그리고 나머지 사진은 고된 노동 끝에 휴식을 취하며 울타리 넘어 먼 풍경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담아낸다. 이 사진에서 근거리의 풍경은 희미하게 오히려 먼 곳의 풍경은 선명하게 포착된다. 이 작업은 생활하는 예술가인 그의 일주일 일과를 함축한다. 실제로는 회사에 출근하는 날과 그렇지 않은 날로 나뉘며 시공간이 명확하게 분리되지만, 사진에서는 안과 밖의 관계는 고정된 채 교묘하게 한 덩어리로 맞물려 있다. 눈에 띄게 달라지는 것은 단지 초점을 어디에 맞추냐의 문제이다.

그렇다면 그의 삶에서 회사의 노동과 예술 활동의 관계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수익 창출의 개념으로 보자면 술 짝을 옮기는 노동과 먼 곳을 바라보는 여가 같은 예술 활동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하지만 작가는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술 짝을 질서정연하게 쌓고 나서 균형 잡힌 그리드와 볼륨감을 통해 때로는 미적 희열을 느끼며 회사에서 육체노동을 하는 그 순간이 오히려 머리를 비우는 휴식의 시간이 된다고 말했다. 뜻밖에 미적 경험과 노동, 휴식의 개념이 반대로도 작동하는 것이다.

사실 예술과 노동을 뚜렷하게 구분하기는 어렵다. 예술은 노동의 창조적 잠재성을 실현하는 활동이고, 노동은 예술의 창조적 가치를 생산하는 중요한 조건이라는 점에서 예술과 노동은 연결되어 있으며 상호 보완적이다. 그렇다고 예술이 노동의 등가물은 아니다. 예술가에게 창작은 노동의 일부이지만, 미적 가치를 생산한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노동을 초과하는 특수한 노동에 해당한다. 예술과 노동은 연결되면서도 때로는 다른 층위의 문제라 할 수 있다.

<영광>에서 예술과 노동의 문제는 다른 차원으로 변주된다. 반복되는 상처는 인간적으로 나약함을 의미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맞서겠다는 의지의 다른 표현이다. 아이로니컬하게도 고통의 흔적이 쾌락의 시간과 겹친다. 그는 상처를 작업의 대상으로 촬영하기 시작하면서 상처가 나기를 마치 기다렸다는 사람처럼 즐겁게 촬영했다고 말했다. ‘영광’이라는 모순적인 제목이야말로 바로 상처가 고통에서 쾌락으로 도약하는 유희적인 측면을 말해준다.

<누가 웅덩이에 자갈을 채웠는가>는 유일한 흑백사진으로 어떤 길을 무심하게 찍은 사진처럼 보이지만 작가의 경험을 단서로 한다면 의미심장하다. 이 사진은 주류 유통회사의 입구 근처의 포장도로와 비포장도로의 경계에 해당한다. 작가는 이곳을 매번 지날 때마다 마음을 다잡으며 예술가와 주류 유통업자 사이를 오가는 관문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두 도로의 차이를 흑백 톤으로 모호하게 만들었다.

사진을 들여다보면 경계 지점에 미묘한 틈새와 자갈 알갱이들이 눈에 띈다. 술 짝을 가득 실은 트럭이 이곳을 지날 때마다 그 무게에 짓눌려 움푹 패는 현상이 종종 발생한다. 때로는  낙차 때문에, 트럭에 실린 술 짝의 열이 흐트러지거나 술병 일부가 튕겨 날아가기도 한다. 이러한 이유로 작가는 차량이 원활하게 다닐 수 있도록 회사 직원 중 누군가가 웅덩이 같은 틈새를 자갈로 채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작가는 입구와 출구, 안과 밖, 예술 노동과 경제 노동 등 그동안 이원적으로 판단했던 균형의 관계를 작용과 반작용 사이에 무게 중심의 문제로 인식하게 되었다. 무거운 것은 단지 술 짝만이 아니다. 예술가라는 이름으로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가 때로 버겁기도 하지만 지금 여기에 계속 살아 있도록 붙들어 매는 힘이기도 하다. 예술가에게 노동은 예술가로서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이다.

작업의 배경을 알고 나면 다소 밋밋하고 고요한 이 사진이 다르게 보이며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느껴질지 모른다. <참을 수 있는 것과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에서는 그러한 긴장 관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작가는 술 짝을 벽처럼 견고한 모습으로 쌓은 사진을 거대한 크기로 출력하고 둥글게 말아 기둥처럼 설치한다. 단단하게 고정된 것 같지만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부동의 이미지이지만 찰나일 수밖에 없는 사진의 양면적인 속성을 잘 보여준다.

기존의 인물 초상 작업에서 타인의 무의식을 포착했던 카메라는 이번에는 자신의 무의식을 끄집어내는 도구가 되었다. 하지만 무거운 술 짝을 들어올려야 하는 그 순간에는 어떠한 새로운 감각도 경험할 수 없었다. 무의식이 들어올 틈도 없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작업에 대한 사유는 술 짝을 내려놓고 나서 나를 돌아보고 주변을 둘러볼 때야 비로소 가능했다. 이번 작업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자신의 짓눌려진 몸을 통해 사유함으로써 작가 자신이 처한 리얼리티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여기에는 피 냄새, 땀 냄새, 살냄새가 물씬 배어 있다.

그동안 예술가에게 생업은 예술에 비해 부차적이며 주름 안으로 숨겨진 삶의 일부에 가까웠다. 김기훈의 작업은 단순히 자신의 노동을 작품의 소재나 모티프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작업의 문제의식으로 만들어 예술과 노동에 대한 지배적인 인식의 바깥을 보여준다. 특히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 소외된 노동과 억압된 무의식을 연결한다. 작가는 <어쩌다 찍힌 사진>에서 언제 어떻게 찍었는지 알 수 없는 우연히 찍혀 휴대폰에 저장된 사진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 사진이 어떠한 계획이나 의도 없이 찍혔다는 점에서 무언의 해방감을 느꼈다고 했다.

이 사진은 니콜라 부리오의 ‘엑스폼(exform)’의 개념을 연상시킨다. ‘exform’은 문자 그대로 형식으로부터 벗어난 것으로, 모든 것을 유용성의 기준으로 재편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배제와 포용의 이분법에서 가치 없고 쓸모없는 존재로 여겨지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또한 포함과 배제의 분류가 이루어지는 영역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 체계를 교란하고 전복할 수 있는 변혁의 지점이기도 하다. 사실상 작가는 그저 휴지통 버튼을 눌러 삭제하면 그만인 이미지를 건져 올려 작업으로 내세운다. 더 이상 예술 사진은 이래야 한다는 강박도 없다. 사진에서는 춤추는 듯한 에너지의 역동성을 느낄 수 있다.

김기훈은 중력을 거스르는 노동을 하며 자본주의의 배제의 논리에 저항하고 카메라라는 기계 장치에 맞서며 유희하는 방식을 탐구한다. 하지만 예술의 문제는 단순히 역학적인 관계로 설명할 수 없다. 예술의 가능성은 예술가들의 삶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술가는 예술가로 살아가기 위해 예술이라는 자유의 영역을 기필코 확보하기 위해 예민하게 중심을 잡고 또 무모하게 잃어버리기를 반복하면서 자기 탄력성을 확보해 나간다. 살아있는 존재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  


평론가 이슬비